우리는 셔틀버스에 올라탔고 미술관에 도착할 때까지 말을 아꼈다. 버스의 문이 다시 열리자 사람들은 단체 관광객처럼 일제히 간격을 유지하며 걸었다. 우리도 그 무리에 섞여 미술관에 도착했다. 로비에 들어선 사람들은 입장권을 사기 위해 줄을 서기 시작했지만 이날 내게 미술관은 그림보다는 대화를 뜻했다. 곧장 그를 카페테리아에 데리고 가서 식사를 주문했다.

파스타와 피자를 먹으면서 한 시간쯤 이야기했던 것 같다. 쭉 잡아당기면 늘어진 치즈처럼 우리의 말투가 변해가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 포만감과 나른함이 적절한 구도로 배여 있었고 나는 다시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해 산책을 제안했다.

“미술관은 호수와 산을 끼고 있어서 주위가 온통 걷기 좋은 길이에요”

그는 ‘산책도 괜찮지만, 우선……’이라고 말끝을 흐렸고 나는 그 뒤에 가려진 말이 전시를 보자는 의미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관람 시간이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다시 로비로 가 예술인 혜택으로 무료입장권을 받고 재빠르게 전시관으로 향했다.

1, 2관 사이에 자리한 대형 홀에 몇 가지 전시품이 공간을 꾸미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열이를 살려내라’라는 문구와 함께 이한열 열사가 피 흘리는 그림이 그려진, 1층 계단부터 3층 창문까지 가린 채 걸려 있는 초대형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누렇게 변색이 된 천이 과거 시위 현장에서 쓰였던 것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회운동 관련한 전시겠거니 생각하고 큰 기대 없이 1관에 입장했다.

전시관 입구에서 상영 중인 ‘열 번의 총성’이라는 흑백 영상물을 볼 때까지도 무슨 전시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한발 먼저 그림을 보는 그의 얼굴은 무엇에 얻어맞기라도 한 듯이 얼어 있었다. ‘시간이 없는데 왜 저렇게 여유를 부릴까’ 재촉하듯 그를 지나치며 그림을 살폈다. 걸려 있는 그림마다 눈에 익숙한 작품이었다. 김구림, 박수근, 이중섭 등 개인 특별전을 해야 할 작가들의 이름이 나란히 있으니까 어색하기까지 했다.

“지금 열리는 전시가 어떤 전시인가요?”

“개관 50주년 기념전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작품들이 한데 모여있군요”

“서울관, 덕수궁관에서도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안내요원의 설명을 듣고 스마트폰을 꺼내 전시 정보를 살펴봤다. 이번 기념전은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을 시기에 따라 과천관, 서울관, 덕수궁관에서 나눠 전시했다. 우리가 도착한 과천관은 한국전쟁 이후 작품을 선보였다. 처음 마주한 파트는 ‘검은, 해’란 이름으로 1950년대 한국 사회가 담긴 미술을 모아놓고 있었다.

내 시선을 오래 잡아당긴 작품은 강운섭의 <유성이 있는 밤하늘(1950년 초반)>이다. 작가는 피난민 시절에 대구 판자촌에서 별이 가득한 밤하늘에 유성이 떨어지는 장면을 크레용으로 그려냈다. 대구는 옛 애인의 도시라서 익숙하지만, 작품 속의 대구는 이국적으로 다가왔다. 정확히 말하면 그림 속에서 지금의 한국과 공통된 무언가를 느낄 수 없었다.

내가 파리에 머물 적에 그곳 사람들은 나이대와 관계없이 공유하는 감수성이 있었다. 이를테면 흑백 영화에 담긴 센강은 지금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강변 풍경을 묘사할 때 청년이나 노인이나 비슷한 뉘앙스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부러웠다. 한국은 세대별로 다른 나라를 살아왔다고 말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여기 좀 보세요”

다른 일행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나는 그에게 이중섭의 은지화가 걸린 곳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아마 이중섭이 담뱃갑을 뜯어서 은박지에 그린 작품일 겁니다,”

“맞아요, 전에 본 적이 있어요”

“그림 도구가 마땅치 않아서 그랬다는 말도 있고, 그렇게 가난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저 구김과 선을 보면 지금 시대에 느낄 수 없는 처절함이 느껴져요”

“시대를 만드는 예술이 있고, 시대가 만드는 예술이 있는 거죠”

우리는 잠시 성화를 바라보듯 이중섭의 작품을 대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지나온 작품을 다시 보러 발길을 돌렸다. 그런 그를 놔두고 나는 그림들에 이끌려 걷기 시작했다. 50년대, 60년대 지나 70년대 파트를 감상하면서 조금은 익숙한 흔적들을 발견했다. 그중에서도 김홍주의 <문(1978)>은 문틀을 오브제로 안쪽에 자리한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당시에는 큰 의미 없이 쓴 문틀이겠지만, 나의 향수를 자극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내가 유치원생이었을 때 주말이면 아버지 차를 타고 어디론가 나서곤 했다. 아버지께서는 도시에서만 지내면 정서에 좋지 않으리라 생각하셨는지 주로 깡촌에 데리고 다니셨다. 당시에 마주했던 자연 풍경들보다 군것질거리를 사서 먹던 슈퍼에 대한 이미지가 생생하다. 슈퍼 안에는 먼지 냄새와 함께 드르륵 열리고 닫히던 저 문이 내 유년 시절 기억의 한쪽을 붙들고 있다.

내가 태어나서 겪은 80년대 파트부터는 크게 새로운 것이 없었다. 뒤늦게 따라온 그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빠른 걸음으로 작품을 훑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시간 안에 관람을 마치고 미술관을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오늘은 술을 마셔야 할 것 같아요”

“인덕원에 가면 마땅한 자리가 있을 테니 이동해요”

이날 우리는 두 번이나 가게를 옮겨 말을 섞었다. 소토보체와 피아니시모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바르셀로나 신임 감독이 언제쯤 경질될 것이냐까지 대화가 이어졌다. 이렇게 취기에 흩어진 말들을 다 붙잡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고기를 굽거나, 비틀거리며 마주한 풍경들은 <2020년 겨울>이란 제목으로 내 기억의 벽면에 걸려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