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고양 아람누리 하이든홀에서 <아람누리 신년음악회 – 선우예권 피아노 리사이틀>이 열렸다. 이날 무대에 오른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은 “오늘이 2020년에 한국에서 열리는 유일한 개인 독주회다”라고 밝혔다.
이번 신년음악회는 시작 전부터 크게 두 가지 사항이 눈에 띄었다. 우선 선우예권이 본인 이름을 걸고서 하는 음악회지만, 2부에 후배 연주자와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특히 선우예권은 두 곡 모두 제2 피아노를 맡으며 후배가 무대에서 돋보일 수 있게 배려했다.
지난해 가을에 선우예권은 명동성당과 함께 영 피아니스트 콘서트 시리즈를 기획했다. 당시에 선우예권은 “신인 피아니스트가 연주 기회를 잡기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다”라며 기획 취지를 밝힌 적이 있다. 이렇게 후배를 배려하는 선우예권의 마음씨가 새해 무대에 그대로 이어졌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최형록, 임주히(좌 측부터) ⓒ 이상권
또한, 이번 공연 프로그램 성격은 신년음악회 특유의 발랄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었다. 선우예권은 1부에서 ‘브람스, 6개의 피아노 소품’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0번’을 다뤘다. 전반적으로 두 곡의 성격은 다르지만, 작곡가의 후기 작품이자 차분한 어조로 곡이 진행되는 공통점이 있다.
2부에서 선우예권은 피아니스트 최형록과 함께 ‘슈베르트, 4개 손을 위한 판타지’를 연주했다. 이 곡은 아름다운 선율을 담고 있으나 외형적인 흥이 넘치지는 않는다. 반면 피아니스트 임주희와 함께한 ‘라벨,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라발스’는 상상력과 힘이 넘치는 작품이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다소 어둡다.
공연 전에 만난 선우예권은 “특별히 신년에 큰 의미를 부여하진 않는다”라며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의 소중함을 생각한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번 공연 특정 시기를 위한 마음가짐보다는 음악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피아노가 아닌 공간을 연주하다
이날 선우예권의 리허설을 백스테이지에서 잠시 지켜봤다. 첫 마디를 듣자마자 피아노 상태가 조금 우려스러웠다. 피아노 울림 자체가 덜 트이기도 했지만, 미세하게 음 균형에 어그러진 부분이 있었다. 소리가 정교하게 고르질 않으면, 피아노 울림이 옅게 퍼질 때마다 지저분하게 다가온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리허설 현장 ⓒ 이상권
공연 시간이 다가와서 객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대에 오른 선우예권은 첫 곡으로 ‘브람스, 6개의 피아노 소품 Op. 118’을 연주했다. 이 작품은 브람스 후기작 가운데 주로 피아노 소품을 작곡한 기간(1892-3)에 탄생했다. 또한, 네 편의 간주곡과 함께 발라드, 로망스까지 총 6편의 소곡으로 이뤄져 있다.
걱정한 대로 피아노 소리가 최상의 상태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선우예권은 공간을 활용한 울림으로 유연하게 연주를 이어갔다. 우선 짧지 않은 홀의 잔향을 고려해서 악보 지시보다 힘을 빼고 연주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여기에 페달 활용도를 높여서 나긋나긋하면서도 관조적인 뉘앙스로 곡을 풀어갔다.
지난 리사이틀(나의 클라라, 2019)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당시에 선우예권은 브람스 초기작인 피아노 소나타 3번을 열정적으로 연주했다. 반면 이번 신년음악회는 브람스가 의도한 리듬, 선율, 화성 기반에 선우예권 특유의 음색이 더해져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다만 세 번째 소곡인 발라드에서 박력이 다소 아쉬웠다. ‘활발하고 힘있게(Allegro energico)’ 연주하란 지시어보다는 차분한 분위기를 의도했다고 느꼈다. 또한, 먼 좌석에서는 당김음 효과를 주는 악센트가 잘 부각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 소곡이자 4번째 인테르메조에서 선우예권의 진가가 드러났다. 선우예권은 이 작품이 지닌 교향악 색채를 피아노로 잘 번역했다. 위 성부와 아래 성부가 대화하듯 진행하며 하나의 극을 형성했다. 특히 ‘소리를 죽이고 여리게(Sotto voce)’부터 포르티시모까지 확대되는 부분에서 피아노가 아닌 공연장 자체를 연주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선우예권은 절대 음량이 큰 연주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주어진 볼륨 안에서 다이내믹 균형을 아주 잘 잡기 때문에 독주 무대에서 전달력에 문제는 없다. 첫 곡인 브람스의 작품을 연주할 때도 적당한 볼륨 안에서 극적인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연출했다. 다만 이어지는 베토벤 작품에서는 이러한 장점을 완전히 살리지는 못했다.
다시 무대에 오른 선우예권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0번’을 연주했다. 이 작품은 베토벤 후기 소나타의 대표작으로 짧고도 연속성을 지닌 1, 2장과 함께 주제와 6개의 변주를 담은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우예권은 이 곡을 두고 “음악적인 구조를 유지하면서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평했다.
이날 선우예권의 베토벤 소나타 해석에 커다란 흠은 없었다. 특히 음의 여백과 타이밍을 이용해 만들어낸 음형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무대 경험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피아노가 소리가 연주회장 내부를 입체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아마 마이크를 피아노 가까이에 대고 촬영한 영상물에서는 울림이 적절하게 담기겠지만, 현장에서 즐기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선우예권의 배려, 후배들의 증명
2부 시작과 함께 선우예권과 최형록이 나란히 피아노 앞에 앉았다. 두 사람은 ‘슈베르트, 4개 손을 위한 판타지’를 연주했지만, 연주가 진행되면서 손발을 맞춘 시간이 짧았다는 점이 드러났다. 또한, 연주 자체도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다음 주 매체에 기고할 때는 해당 연주에 대해 조금 더 언급하겠지만, 편하게 쓰는 자유 리뷰에서까지 굳이 이런 연주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다음 곡으로 선우예권과 임주희가 ‘라벨, 라 발스(두 대의 피아노 버전)’를 연주했다. 이 작품은 곡명에서 드러나듯 ‘왈츠(Valse)’를 위한 작품이다. 초판 악보 표지에는 라벨이 “1855년에 어떤 궁전에서 왈츠에 영감을 받았다”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라벨은 무용에 맞춘 음악을 구상했다가 결국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라 발스를 완성했다. 또한, 1년 뒤에 같은 곡을 피아노 버전으로 편곡해서 다시 발표했다.
라 발스는 크게 왈츠의 발생, 부흥, 쇠퇴, 파괴로 나뉜다. 그만큼 곡 안에서 여러 형태로 왈츠 리듬이 바뀌곤 한다. 또한, 원곡이 오케스트라 버전인 만큼 피아노가 다양한 악기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즉 피아노가 춤의 박자감을 살림과 동시에 오케스트라가 되어야 한다. 다만 입체적인 음향을 위해 화음과 그렇지 않은 음들이 유연하게 구사되기 때문에 조성이 모호하게 표현될 우려가 있다.
선우예권은 피아노 독주 버전인 라 발스에서 오케스트라 효과를 재현하면서도 곡 진행을 깔끔하게 처리하기로 유명하다. 그렇지만 두 대의 피아노 버전은 이번 신년음악회에서 처음 연주한다고 알려졌다. 또한. 이번 연주에서 선우예권은 제2 피아노를 맡았기 때문에 곡의 주요한 부분은 임주희가 진행했다.
피아니스트 임주희 ⓒ 이상권
임주희는 골격이 크지 않고 마른 체형이나 연주 동작에서 무게중심 옮기는 타이밍이 굉장히 빠르다. 여기에 타고난 힘과 긴 팔이 주는 이점을 활용해서 남성 못지않은 피아노 볼륨을 구사한다. 이날 연주에서도 남성인 선우예권보다 오히려 임주희의 피아노 소리가 더 시원하게 들렸다. 선우예권이 마련해준 새해 무대에서 임주희는 성장하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이날 임주희의 연주에서 기교적으로는 크게 문제가 될 지점은 없었다. 다만 연주에 너무 힘이 들어간 인상을 받았다. 이러한 부분을 선우예권이 잘 보조해줘서 나름의 조화로운 연주를 만들어냈다. 그렇지만 이 곡 역시 사전에 완벽히 조율되고 올려진 느낌은 아니었다. 한 번 더 무대에 올려본다면 두 사람이 훨씬 수준 높은 연주를 들려주겠단 기대가 생겼다.
감상 위치 : 2층 C구역 (고양 아람누리 취재용 티켓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