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조명은 소프라노를 비추고 있었다. 오선지 위에 가지런히 잠들어있던 음표들이 노래를 타고 객석에 흩뿌려졌다. 투명한 목소리에 작곡가의 생애가 비칠 때면, 한 철의 감흥이 가슴 한구석에서 돋아나기 시작했다. 지휘자의 손짓을 따라 공연장 내부가 온갖 울림으로 수북해졌다. 음악이 바뀔 때마다 또 다른 계절이 펼쳐지곤 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한국 영화 중에선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좋아합니다.”

소프라노 엘사 드레이지는 첫 한국 공연을 앞두고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이날 엘사 드레이지가 언급한 영화는, 사람의 생애를 계절에 비유하여 끊임없이 순환하는 세상사를 담고 있다. 공교롭게도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가 이번 공연 프로그램과 닮은 점이 있다.

소프라노 엘사 드레이지

지난 20일 경기도문화의전당 대극장에서 <마시모 자네티 & 엘사 드레이지>가 열렸다. 마시모 자네티가 이끄는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슈트라우스와 말러의 작품을 통해 인간의 삶을 조명했다. 협연자로 나선 엘사 드레이지는 순수한 아이부터 달관한 노인까지 곡에 따른 다양한 감정을 소화했다.

1부는 작곡 시기가 다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품을 차례로 다뤘다. 슈트라우스가 청년기에 작곡한 ‘아폴로 여사제의 노래’는 생명의 기쁨이 담겨 있다. 반면 유작인 ‘4개의 마지막 노래’에서는 죽음을 차분히 받아들이는 듯한 작곡가의 심경이 읽힌다. 대조적인 곡을 나란히 배치해서 청년에서 노년으로, 여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듯한 흐름이 생겼다.

이어지는 2부에서 ‘말러, 교향곡 4번’이 펼쳐졌다. 이 작품은 경쾌한 종소리로 시작하지만, 진행될수록 현실 세계의 희로애락이 묻어난다. 이렇게 1악장부터 3악장까지 비극적인 정서가 담긴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그렇지만 마지막 악장에서 아이의 눈에 비친 하늘나라를 노래하며 태초의 천진난만함으로 회귀한다.

눈 녹은 가지에서 새싹이 돋아나듯이 전체 프로그램은 순환적 서사를 끌어냈다. 이날 무대에서 인간과 계절과 음악이 겹쳐지며 무한히 되풀이하는 생멸을 가늠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마시모 자네티는 전체 프로그램 구성을 통해 새로운 은유를 끌어내곤 하지만, 미시적으로는 원작자의 생각을 그대로 구현하고자 한다.

현실을 고려한 원전주의자

마시모 자네티가 작곡가의 의도를 중시한 점은 악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기 필하모닉은 1995년에 개정한 ‘말러 교향곡 4번 원전판(UE13823)’을 기초로 연주했다. 이 에디션은 말러의 의도를 가장 가깝게 담아냈다고 평가받는다.

말러는 교향곡 4번에서 다이내믹의 폭을 크게 잡았을 뿐만 아니라, 그 기준을 세부적이면서도 복합적으로 적용했다. 성부마다 볼륨을 다르게 진행하거나, 같은 다이내믹 안에서도 악기별로 타이밍 차이를 주었다.

마시모 자네티와 경기 필하모닉은 말러의 다이내믹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다이내믹으로 인해 발생하는 음악적인 뉘앙스를 거의 훼손하지 않고 무대에서 펼쳤다. 이로 인해서 교향곡 4번이 지닌 ‘오케스트라 안에 실내악’과 같은 느낌을 생생히 구현했다.

더불어 공연장 음향상태와 악단의 음악적인 구현 능력을 복합적으로 고려한 흔적이 읽혔다. 같은 프로그램으로 열린 일산 공연과 비교해서 음향 밸런스를 포함해 일부 템포와 타이밍에 변화를 주었다. 이처럼 유연한 접근은 더 안정적인 연주로 이어졌다.

협연자 선정에서도 원곡 느낌을 살리려는 인상을 받았다. 말러가 교향곡 4번 4악장에 차용한 가사는 아이의 관점에서 쓰였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마시모 자네티가 엘사 드레이지를 섭외했다고 추측한다. 엘사 드레이지의 맑고 투명한 음색은 순수한 동심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젊고 아름다운 목소리

엘사 드레이지는 선생의 특별한 관리로 이른 시기에 목이 상하는 일을 방지했다. 어린이 합창단에서 활동하다가 17살 때야 비로소 본격적인 소프라노 발성을 익혔다. 덕분에 티 없이 깨끗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음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경기문화의전당에서 엘사 드레이지의 젊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슈트라우스의 ‘4개의 마지막 노래’에서 그 진가를 확인했다. 이 곡은 엘사 드레이지가 작업 중인 앨범 리스트에 들어 있다. 이를테면 세부적인 표현까지 준비가 잘 된 상태에서 한국 무대에 섰다.

슈트라우스의 ‘4개의 마지막 노래’는 시를 주제로 오케스트라 반주를 붙인 가곡이다. 가사를 중점으로 두고 음악 형식을 구성한 통절 형태가 쓰였다. 엘사 드레이지는 드리우는 죽음을 자연 속의 안식으로 풀어낸 원문의 뉘앙스를 그대로 살려냈다.

경기필하모닉마스터시리즈Ⅹ 〈마시모자네티&엘사드레이지〉 (2019. 7. 20.)

다만 자연스러운 발성을 추구하는 엘사 드레이지의 특성상 공연장을 가득 채울 만큼 성량이 크지는 않았다. 마시모 자네티는 오케스트라 다이내믹의 균형점을 다소 낮게 형성해 협연자가 편하게 노래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과정에서 오케스트라 색채감이 다소 떨어지는 아쉬움이 뒤따랐다.

엘사 드레이지는 경기 필하모닉과 협연을 통해 아시아 무대에 데뷔했다. 성악가의 일생을 계절에 비유하자면, 만 28세인 엘사 드레이지는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있다. 엘사 드레이지의 성대가 건강한 시기에 노래를 듣는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훗날 엘사 드레이지가 세계 최고의 디바로 불리더라도 이번 무대가 생각날지도 모른다. 메마른 늦가을에 봄볕을 그리워하듯이.


 

‘더 스트링스(thestrings.kr)’와 ‘월간 리뷰 8월호’에 실림